그날 따라 이상하게 발걸음이 무거웠다. 아니, 사실은… 매일이 그랬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멈춰 선 곳이 바로 그 서점이었다. ‘책향기’라고 적힌 작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을까? 이 길을 수없이 오갔는데도 한 번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것 같다.
사람이 이상한 게, 어떤 날은 평소와 똑같은 풍경도 전혀 다르게 보이곤 한다. 그런 날이었나 보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책들이 나를 부르는 듯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냥 들어가고 싶었다. 집에 가기 싫다는 마음이 더 컸을지도 모르겠다. 민호씨는 오늘도 야근이라고 했고, 아이들은… 아, 이제 아이들이라고 부를 나이도 아니지. 스물셋과 스물하나.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느라 바쁜 나이.
문을 열고 들어서니 은은한 커피향과 책 냄새가 섞여 나를 감쌌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이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서점에 왔었나? 기억도 안 난다. 아이들 교과서나 문제집 사러 갔던 게 전부였을 텐데.

“어서 오세요.”
낮고 따뜻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계산대 뒤편에서 한 남자가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십 정도 되어 보이는, 약간 헝클어진 머리에 온화한 인상의 사람이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어색하게 인사를 받으며 나는 책장 사이로 몸을 숨겼다. 뭔가 민망했다. 뚜렷한 목적도 없이 그냥 들어온 것 같아서. 하긴, 정말로 목적이 없긴 했다.
책장을 둘러보니 생각보다 다양한 책들이 있었다. 소설, 에세이, 시집… 특히 한쪽 코너에는 ‘마음에 관한 책들’이라는 손글씨 팻말이 붙어 있었다. 뭔가 따뜻해 보이는 글씨체였다.
그 코너로 발걸음이 향했다. ‘아무도 나를 모른다’, ‘나를 찾아가는 여행’, ‘마흔 이후의 삶’… 제목만 봐도 마음 한구석이 뜨끔했다. 특히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좋은 책이세요.”
뒤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 깜짝 놀랐다. 아까 그 남자였다. 언제 다가왔는지도 모르게.
“아, 네… 그런가요?”
“도종환 시인의 시집이에요. 읽어보시면 마음이 한결 편해지실 거예요.”
그는 내 손에 들린 책을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뭔가 확신에 찬 어조였는데, 이상하게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어떻게 내 마음을 아는 것처럼 말하지?
“요즘 마음이 좀 복잡하세요?”
너무 직접적인 질문에 당황했다. 하지만 거짓말하기 싫었다. 아니, 거짓말할 힘도 없었다.
“음… 그런 것 같아요. 뭔가 애매하고… 잘 모르겠어요, 제 마음을.”
이상했다. 남편에게도, 미경이에게도 제대로 털어놓지 못했던 마음을 낯선 사람에게 이렇게 쉽게 말하다니.
“그런 때가 있죠. 특히 우리 나이쯤 되면요.”
우리 나이라니. 뭔가 동질감을 느끼는 표현이었다. 그동안 남편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여기 앉아서 천천히 보세요. 급할 것 없어요.”
그가 작은 의자를 가져다 놓았다. 서점 한구석, 창가 자리였다. 밖으로는 단풍이 물든 나무들이 보였다.
“감사해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앉아 있어도 되나요? 사실 책을 살 건지도 확실하지 않은데…”
“당연히 괜찮아요. 책은 만나는 거니까요. 억지로 만날 수 없어요.”
책은 만나는 거라니. 참 특이한 표현이었다. 하지만 왜인지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나는 그 작은 의자에 앉아 시집을 펼쳤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첫 줄을 읽자마자 무언가가 가슴을 쳤다. 흔들리지 않고… 나는 지금까지 흔들리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써왔던가. 좋은 아내, 좋은 엄마, 좋은 며느리가 되려고. 하지만 결국 지금 나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고개를 들어보니 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내 눈가에 눈물이 맺혔는지도 모르게.
“아, 죄송해요. 괜찮아요.”
손등으로 급히 눈가를 훔쳤다. 창피했다. 처음 만난 사람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괜찮다고 말씀하시는데,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으세요.”
그의 말에 더 당황했다. 보통은 ‘괜찮다’고 하면 그냥 넘어가는데. 민호씨도 그랬고, 아이들도 그랬고.
“그냥… 시가 좋아서 그래요. 오랜만에 시를 읽으니까…”
반은 거짓말이고 반은 진짜였다. 시가 좋긴 했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내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든 것이었다.
“시를 좋아하시는구나. 그럼 이것도 보세요.”
그가 다른 책을 하나 더 가져왔다. ‘나를 부르는 소리’라는 제목의 시집이었다.
“이건 제가 특히 좋아하는 시집이에요. 읽다 보면… 아, 이런 마음이 나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드실 거예요.”
나만 아니구나. 그 말이 왠지 위로가 되었다. 정말 이런 마음이 나만이 아닐까? 아침에 눈을 떴을 때의 그 공허함, 하루 종일 바쁘게 지내면서도 느끼는 그 허전함, 밤에 잠자리에 누웠을 때의 그 쓸쓸함.
“시집을 많이 읽으시나 봐요.”
“음, 취미 정도로요. 사실 전에는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쳤거든요. 문학을 좋아해서.”
아, 그래서 이렇게 자연스럽게 책을 권하는구나. 선생님이었다니. 왠지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우리 아이들도 이런 선생님을 만났다면 좋았을 텐데.
“지금은 여기서 서점을 하시는 거군요.”
“네. 퇴직하고 나서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요. 책이랑 함께 있으면 외롭지 않거든요.”
외롭지 않다니. 부러운 말이었다. 나는 요즘 집에 혼자 있어도 외롭고,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외로웠다. 심지어 민호씨와 함께 있을 때도.
“부인분도 책을 좋아하시나요?”
“아… 아내는 몇 년 전에 먼저 갔어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실수했구나. 어쩌지?
“죄송해요. 제가 너무 무심코…”
“아니에요, 괜찮아요. 이제는 얘기할 수 있어요.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까.”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눈빛 어딘가에 여전한 그리움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잠시 조용해졌다. 서로 다른 이유로 마음이 복잡한 두 사람이 작은 서점에서 처음 만난 그 순간.
“그래도 좋은 추억들이 많으실 거예요.”
“네, 그렇죠. 그 추억들이 있어서 지금도 살아갈 수 있는 것 같아요.”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추억이 있다는 게. 나에게도 그런 추억이 있나? 민호씨와의… 글쎄, 있긴 할 텐데. 왜 생각이 안 날까?
“저는 박인수라고 해요.”
“아, 네. 저는 이지연이에요.”
악수를 나눴다. 따뜻한 손이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이렇게 다정하게 악수를 나눠봤을까?
“지연씨는 이 근처에 사세요?”
“네,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서점이 있는 줄 몰랐어요.”
“작년에 문을 열었거든요.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았어요.”
작년에. 그럼 내가 모르는 게 당연했구나. 하지만… 정말 모르기만 했을까? 혹시 보고도 관심이 없어서 그냥 지나쳤던 건 아닐까?
“앞으로 자주 오실 수 있어요. 새로운 책들도 계속 들어오고요.”
자주 와도 된다니.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갈 곳이 생겼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때 시계를 보니 벌써 네 시가 넘었다. 어?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지? 마트에서 나온 게 두 시 반쯤이었는데.
“아,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집에 가야겠어요.”
“아쉽네요. 좋은 시간이었는데.”
정말 좋은 시간이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이렇게 편안하게 대화를 나눠봤을까?
“이 책들… 빌려 가도 될까요?”
“당연히요. 마음에 들면 나중에 사시면 되고, 아니면 그냥 읽고 가져다주셔도 괜찮아요.”
이런 서점이 있구나. 도서관도 아닌데 책을 빌려준다니. 뭔가 비현실적이면서도 따뜻했다.
“정말 감사해요. 그럼… 내일 모레쯤 다시 올게요.”
“기다릴게요.”
기다린다니. 누군가 나를 기다린다는 말을 들어본 게 언제였을까?
집으로 가는 길에 시집을 꼭 안고 걸었다. 가벼운 책이었지만 왠지 마음이 무거웠다. 아니, 무겁다기보다는… 뭔가 채워진 느낌이었다. 빈 공간에 뭔가가 들어온 것 같은.
민호씨에게 말해야 할까? 서점에 다녀왔다고. 책을 빌려왔다고. 하지만 뭔가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이 감정이 뭔지 잘 모르겠지만… 나만 간직하고 싶었다.
집에 도착해서 거울을 보니 조금 달라진 내 모습이 보였다. 뭐가 달라졌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분명히 뭔가 다른 것 같았다. 눈빛이? 표정이?
그날 밤, 민호씨는 역시나 늦게 들어왔다.
“오늘 뭐 했어?”
“응, 그냥… 장 보고, 집안일 하고.”
거짓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렇게 했으니까. 다만… 그 사이에 특별한 시간이 있었다는 걸 말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민호씨는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씻으러 들어갔다. 예전 같으면 섭섭했을 텐데,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침대에 누워 시집을 펼쳤다.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다”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오늘 박인수라는 사람을 만나면서,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아주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소리를.
내일 모레 다시 가겠다고 했는데… 정말 갈까? 가고 싶긴 한데, 괜찮을까?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잠이 들었다. 오랜만에 편안한 잠이었다.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이 게시물은 삼성전자 ACE 활동의 일환으로, 삼성전자로부터 활동에 따른 수수료 등 경제적 대가를 제공받습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