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색깔을 찾아준 그 남자 (3장. 감정의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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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한 지 사흘이 지났다. 내일 모레라고 했으니까… 오늘이 그날이다. 그런데 정말 가야 할까?

아침부터 마음이 이상했다. 설렘인지 불안함인지 구분이 안 된다. 언제 마지막으로 이런 기분을 느껴봤을까? 아이들 소풍 보내던 날? 아니면… 훨씬 더 오래전, 민호씨와 처음 만날 때?

“오늘 뭔가 다르네.”

민호씨가 아침에 말했다. 뭐가 다르다는 걸까?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나? 평소보다 부지런히 움직였나?

“그래? 뭐가?”

“음… 기분이 좋아 보여.”

기분이 좋다니.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좋다기보다는… 뭔가 기대된다는 느낌? 오랜만에 갈 곳이 생겼다는 느낌?



민호씨가 출근하고 나서 옷장 앞에 오래 서 있었다. 뭘 입을까? 평소 같으면 아무거나 입었을 텐데, 오늘은 왜 이렇게 고민이 될까?

결국 조금 더 신경 써서 입었다. 새로 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좀 더 젊어 보이는 옷으로. 거울을 보니… 음, 나쁘지 않다. 아니, 좋다고 해야 하나?

화장도 평소보다 조금 더 했다. 립스틱도 발랐다. 언제 마지막으로 립스틱을 발랐을까? 특별한 날이 아니면 잘 안 하게 되더라.

집을 나서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정말 오랜만이다, 이런 기분. 어디론가 가는 게 이렇게 기대될 수 있다니.

서점 앞에 도착했는데 문득 망설여졌다. 정말 들어가도 될까? 괜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그냥 책 빌린 거 돌려주고 오는 거니까… 당연한 일이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역시나 박인수 씨의 따뜻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약속대로 왔어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정말 기다리고 있었다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상하다. 왜 이럴까?

“책은 어떠셨어요?”

빌려간 시집 이야기였다. 정말 감동적이었다. 특히 그 구절… 흔들리면서 피는 꽃에 관한.

“정말 좋았어요. 오랜만에 이렇게 마음에 와 닿는 시를 읽었네요.”

“어떤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드셨어요?”

“음… 흔들리면서 피는 꽃 이야기요. 그동안 흔들리지 않으려고만 했는데, 흔들리는 게 자연스러운 거였구나 싶어서…”

말을 하다가 괜히 부끄러워졌다. 너무 개인적인 얘기를 하는 건 아닐까?

“맞아요. 완벽하려고 하지 않아도 되는 거죠. 흔들리는 것도 살아있다는 증거니까요.”

그의 말이 마음에 깊이 스며들었다. 흔들리는 것도 살아있다는 증거라니. 그럼 지금 내 마음이 흔들리는 것도… 괜찮은 건가?

“새로운 책도 보시겠어요?”

“네, 좋아요.”

이번에는 다른 코너로 안내해 주었다. ‘인생에 관한 에세이들’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이 책은 어떠세요? ‘마흔 이후, 나를 위한 시간’이라는 책인데요.”

제목부터 마음에 들었다. 나를 위한 시간… 언제 마지막으로 나를 위한 시간을 가져봤을까?

“저…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네, 뭐든지요.”

“혹시 결혼하셨을 때, 부인분을 위한 시간과 당신을 위한 시간을 어떻게 나누셨어요?”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다니. 너무 개인적인 건 아닐까? 하지만 정말 궁금했다.

“음…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는 잘 못했어요. 서로를 위한다고 하면서 정작 자신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정말요?”

“네. 나중에야 깨달았죠. 자신이 행복해야 상대방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걸요.”

자신이 행복해야… 나는 행복한가? 가족들을 위해 살아왔는데, 정작 나는 어떤가?

“그런데 쉽지 않죠. 특히 여성분들은 더 어려우실 것 같아요. 늘 누군가를 챙기는 역할이니까요.”

정말 그렇다. 어떻게 내 마음을 이렇게 잘 아는 걸까?

“맞아요. 항상 누군가를 먼저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그게 당연한 줄 알았는데…”

“당연한 게 아니에요. 물론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은 소중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포기할 필요는 없어요.”

이런 대화를 나눠본 게 언제였을까? 민호씨와는 이런 깊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아니, 할 기회가 없다고 해야 하나.

“커피 한 잔 하시겠어요? 뒤쪽에 작은 공간이 있어요.”

서점 뒤쪽에 정말 작은 카페 공간이 있었다. 테이블 두 개, 의자 몇 개. 아담하지만 아늑했다.

“직접 만드신 거예요?”

“네. 혼자 있을 때 심심해서요. 손님들이 오시면 가끔 같이 차 마시곤 해요.”

손수 끓인 커피를 건네받았다. 향이 좋다. 이런 여유로운 시간이 언제 마지막이었을까?

“가족들은 뭐라고 하세요? 이렇게 서점 하시는 거에 대해서요.”

“아… 제가 혼자라서요. 아내가 먼저 가고 나서는… 아이들이 없어서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아, 맞다. 지난번에 말씀하셨지. 그런데 아이들이 없다니…

“아이를 원하지 않으셨어요?”

“갖고 싶었죠. 하지만 아내가 몸이 안 좋아서… 그래도 둘이서 행복했어요.”

그의 목소리에 그리움이 배어 있었다. 진짜 사랑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러워요.”

“뭐가요?”

“그렇게 사랑할 수 있었다는 게요.”

말하고 나서 깜짝 놀랐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했을까? 너무 솔직한 게 아닌가?

“지연씨도 사랑하고 계시잖아요. 가족들을.”

“그렇긴 한데… 요즘은 잘 모르겠어요. 사랑인지, 습관인지.”

또 너무 솔직하게 말했다. 이 사람 앞에서는 왜 이렇게 마음이 열리는 걸까?

“그런 시기가 있어요. 결혼생활이 길어지면요. 그런데 그게 잘못된 건 아니에요. 다시 찾을 수 있어요.”

“정말요?”

“네. 다만… 자신부터 찾아야 해요.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부터요.”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정말 모르겠다. 아내, 엄마, 며느리… 그런 역할들 말고, 진짜 나는 누구일까?

“어렵죠?”

“네… 너무 오랫동안 다른 사람으로 살아온 것 같아요.”

“천천히 찾아가면 돼요. 급할 것 없어요.”

그의 말이 따뜻했다. 급할 것 없다니. 언제부터 모든 걸 빨리빨리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인수 씨는 언제 자신을 찾으셨어요?”

“저도 아직 찾아가는 중이에요. 아내를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시작했으니까요.”

“그래도 이렇게 서점을 하시는 걸 보면… 자신이 뭘 원하는지 아시는 것 같은데요.”

“책과 함께 있는 걸 좋아한다는 건 알겠어요. 사람들과 이렇게 대화하는 것도 좋고요.”

나는 뭘 좋아할까? 뭘 하고 있을 때 행복할까?

“지연씨는 어떤 걸 좋아하세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요리? 청소? 그런 건 좋아한다기보다는 해야 하는 거고…”

“취미는 없으세요?”

취미라니. 그런 걸 가져본 게 언제였을까?

“예전에는… 책 읽는 걸 좋아했어요. 결혼 전에는 꽤 많이 읽었는데.”

“어떤 책들을요?”

“소설이요. 특히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지금 생각해보니 오랫동안 소설을 읽어보지 않았네요.”

“그럼 소설 한 권 빌려가시겠어요?”

“좋아요.”

그가 선택해 준 책은 ’82년생 김지영’이었다.

“이 책… 말이 많이 나왔던 책이죠?”

“네. 읽어보시면 공감되는 부분이 많으실 거예요.”

공감… 요즘 누군가에게 공감받는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느낀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벽시계를 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어떻게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갔을까?

“집에 가야겠어요. 저녁 준비도 해야 하고…”

“그러세요.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나도 즐거웠다. 정말 오랜만에 이렇게 마음 편하게 대화를 나눠봤다.

“저도요. 다음에 또 와도 될까요?”

“언제든지 환영이에요.”

집으로 가는 길이 아쉬웠다. 더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아니, 정확히는… 더 함께 있고 싶었다는 게 맞을까?

이상한 마음이다. 뭘까, 이 감정은? 설렘? 기대감? 아니면…

아니다. 생각하지 말자. 너무 깊이 생각하면 복잡해진다. 그냥… 좋은 사람을 만났다는 정도로 생각하자.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게 단순히 ‘좋은 사람’에 대한 감정이 아니라는 걸. 뭔가 더 특별한 감정이 시작되고 있다는 걸.

집에 도착해서 거울을 봤다. 얼굴이 환해져 있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이런 표정을 지어봤을까?

민호씨가 들어오기 전까지 계속 그 시간을 되새겼다. 인수 씨와 나눈 대화들, 그의 따뜻한 눈빛, 부드러운 목소리…

“오늘 뭔가 좋은 일 있었어?”

민호씨가 물었다. 그렇게 티가 났나?

“아… 그냥 기분이 좋았어.”

거짓말은 아니었다. 정말 기분이 좋았으니까. 다만… 그 이유를 말할 수 없을 뿐이었다.

“그래? 좋네.”

민호씨는 그 정도로 관심을 끝냈다. 예전 같으면 뭐가 좋았는지 더 물어봤을 텐데. 언제부터 우리는 이렇게 서로에게 무관심해졌을까?

밤에 침대에 누워서 빌려온 소설을 펼쳤다. ’82년생 김지영’. 주인공이 나와 비슷한 나이의 여성이라고 했던가?

읽기 시작하자마자 빠져들었다. 이렇게 몰입해서 책을 읽어본 게 얼마만일까? 주인공의 이야기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결혼 후 자신의 이름 대신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아내로 불리게 되는 이야기.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가족을 위해 살아가는 이야기.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점점 자신을 잃어가는 이야기.

가슴이 아팠다. 너무 현실적이어서. 너무 내 이야기 같아서.

옆에서 민호씨가 코를 골고 있었다. 평화로운 잠에 빠져 있는 모습. 부럽다. 나는 요즘 잠들기가 어려운데.

책을 덮고 천장을 봤다. 오늘은 특별한 하루였다. 아니, 특별한 하루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인수 씨를 만나면서 뭔가 변화가 시작된 것 같다.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고,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궁금해지고…

그리고 무엇보다… 누군가에게 나라는 사람으로 관심받는다는 느낌. 아내나 엄마가 아닌, 그냥 이지연이라는 사람으로.

이 감정이 뭘까? 우정일까? 아니면… 더 복잡한 감정일까?

잠이 안 와서 다시 책을 펼쳤다. 김지영의 이야기를 더 읽고 싶었다. 그리고… 내 이야기도 생각해보고 싶었다.

나는 누구인가? 이지연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그런 질문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예전에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아니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질문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생각해보고 싶다. 나 자신에 대해서, 내 인생에 대해서.

그리고… 오늘 만난 그 사람에 대해서도.

박인수. 따뜻한 사람이었다. 나를 이해해주는 것 같은 사람이었다. 함께 있으면 편안한 사람이었다.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오랜만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설렘 같은 것.

위험한 감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결혼한 여자이고, 가정이 있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잠시만이라도 이 감정을 느껴보고 싶었다.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는 이 감정을.

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냥 좋은 사람을 만났다는 정도로 끝날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이 감정 자체만으로도 충분하다.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잠이 들었다. 오랜만에 평온한 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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