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색깔을 찾아준 그 남자 (나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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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발견 (5-6장) – 진정한 자신의 모습과 마주함, 선택의 기로  

위기의 순간 (7장) – 관계의 발각 위험,

도덕적 딜레마의 절정 내적 결단 (8장) – 마음속 진실과 마주하며 결정을 내림  

새로운 시작 (9-10장) – 자신만의 색깔을 찾아 새로운 삶을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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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이 지났다. 인수 씨를 만나지 않은 지 벌써 일주일. 미경이의 말을 듣고 나서 스스로 거리를 두려고 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매일 그 길을 지나가면서 서점을 보게 된다. 불이 켜져 있으면 그가 있다는 뜻이고, 꺼져 있으면… 문득 궁금해진다. 어디 갔을까, 뭘 하고 있을까.

이런 내 모습이 한심스럽기도 했다. 중년의 아줌마가 이럴 수는 없는 거 아닌가? 하지만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지연아, 얼굴이 왜 그래?”

수진이가 갑자기 집에 왔다. 회사 근처에 볼일이 있다면서 들렀다고 했다.

“그런가? 뭐가 이상해?”

“뭔가… 생기가 없어 보여. 아픈 거 아니야?”

딸의 눈에도 그렇게 보이나 보다. 사실 요즘 잠도 잘 안 오고, 밥맛도 없고…

“괜찮아. 그냥 좀 피곤해서.”

“엄마, 요즘 뭐 하고 지내?”

뭘 하고 지내냐니… 별다른 게 없다. 예전처럼 청소하고, 요리하고, 빨래하고… 그런데 왜 이렇게 무의미하게 느껴질까?

“그냥… 집안일 하고, 가끔 친구들 만나고.”

“취미 같은 거 없어? 엄마도 뭔가 재미있는 거 했으면 좋겠는데.”

취미… 예전에는 책 읽기가 취미였는데. 요즘은… 음,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그것도 복잡한 감정과 연결되어 있어서.

“엄마 나이에 무슨 취미야?”

“나이가 뭐가 중요해? 우리 회사에 쉰 살 넘은 선배가 있는데, 요즘 그림 배우기 시작했어. 되게 재미있어 한다던데.”

그림이라니. 생각해본 적 없는 분야였다.

“엄마도 뭔가 해봐. 운동이든, 취미든. 아빠랑만 있으면 심심하잖아.”

아빠랑만 있으면 심심하다니… 맞는 말이었다. 요즘 민호씨와 있어도 할 말이 없었다.

“생각해볼게.”

수진이가 가고 나서 혼자 생각에 잠겼다. 정말 뭔가 새로운 걸 시작해볼까? 그림? 운동? 음악?

아니면… 다시 일을 해볼까? 결혼 전에는 회사에서 일했는데. 물론 지금은 경력이 단절되어서 쉽지 않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인수 씨가 떠올랐다. 그는 퇴직 후에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고 했다. 서점을 여는 게 쉬웠을까? 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라서 행복해 보였다.

나는 뭘 좋아할까? 정말 모르겠다. 너무 오랫동안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아왔기 때문에 내가 뭘 원하는지 잊어버린 것 같다.

그날 저녁, 민호씨에게 말해봤다.

“여보, 나 뭔가 새로운 일을 해볼까 생각 중이야.”

“새로운 일이라니? 뭔데?”

“아직 정하지는 않았는데… 취미든, 일이든.”

민호씨가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왜? 집에서 하는 일도 많은데.”

“집안일만으로는… 좀 심심해.”

“심심하면 친구들이랑 만나면 되지.”

또 그런 식으로만 생각하는구나. 친구 만나는 것과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은 다른데.

“그런 게 아니라… 뭔가 내가 할 수 있는 일,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

“의미 있는 일? 지금도 충분히 의미 있게 살고 있잖아. 가정을 돌보는 것보다 의미 있는 일이 어디 있어?”

또 그 말이다. 가정을 돌보는 게 유일하게 의미 있는 일인 것처럼.

“나를 위한 일은 안 돼?”

“나를 위한 일이라니… 가족이 잘되는 게 네게도 좋은 거 아니야?”

같은 대답의 반복이었다. 더 이상 얘기해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그냥… 생각해보는 거야.”

“음… 그래. 하지만 너무 무리하지는 마.”

무리하지 말라니. 새로운 걸 시작하는 게 무리라는 뜻인가?

며칠 더 지났다. 그동안 인수 씨 생각을 지우려고 노력했지만… 안 됐다. 오히려 더 간절해졌다.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고, 그의 조언을 듣고 싶었다.

결국… 가기로 했다. 미경이의 말도, 민호씨의 시선도, 사회의 기대도…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나는 그냥 한 사람으로서, 이지연이라는 사람으로서 그를 만나고 싶었다.

오후 두 시쯤 서점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역시나 따뜻한 분위기가 나를 맞았다.

“어서 오세요… 아, 지연 씨!”

인수 씨의 얼굴이 환해졌다. 정말 반가워하는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그러게요. 어떻게 지내셨어요? 기다렸는데 안 오셔서…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 했어요.”

기다렸다니. 정말 기다렸을까? 가슴이 뛰었다.

“아… 그냥 바빠서요.”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진실을 말하기는 어려웠다. 사람들이 위험하다고 해서 안 왔다고 할 수는 없잖아.

“책은 어떠셨어요? 82년생 김지영?”

“너무 좋았어요.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어요.”

“그럴 줄 알았어요. 많은 여성분들이 그 책을 읽고 자신의 이야기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정말 그래요. 읽으면서 내가 혼자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혼자가 아니죠.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의 말이 위로가 되었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구나. 내 고민이 특별한 게 아니구나.

“인수 씨…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네, 뭐든지요.”

“다른 사람들 눈에는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본인은 뭔가 허전하고 의미를 찾지 못하겠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 자신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워서 일반적인 질문처럼 했다.

인수 씨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먼저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게 뭔지 찾아야 할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이 바라는 모습이 아니라, 진짜 자신이 원하는 모습 말이에요.”

“그게 쉽지 않아요. 너무 오랫동안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다 보니까…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요.”

“천천히 찾아가면 돼요. 어떤 순간에 행복했는지, 어떤 일을 할 때 보람을 느꼈는지… 작은 것부터 생각해보세요.”

어떤 순간에 행복했을까? 요즘에는… 여기 와서 그와 대화할 때가 가장 행복했다. 하지만 그 말은 할 수 없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분명 행복했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자라고 나니까… 뭔가 빈 공간이 생긴 것 같아요.”

“당연한 일이에요. 엄마로서의 역할이 줄어들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찾아야 하는 시기인 거죠.”

정체성… 나는 누구인가? 이지연이라는 사람은?

“새로운 정체성을 찾는 게 쉽지 않네요.”

“그래서 많은 분들이 이 시기에 새로운 도전을 하시더라고요. 늦은 나이에 공부를 다시 시작하거나, 새로운 취미를 갖거나…”

“저도 그런 생각을 해봤어요. 하지만… 주변에서는 그냥 현재에 만족하라고 하네요.”

“주변 사람들은 변화를 두려워하는 경우가 많아요. 특히 가족들은요. 현재 상태를 유지하는 게 안전하다고 생각하니까요.”

정확한 말이었다. 민호씨도 그랬고, 미경이도 그랬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용기를 내야죠. 다른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길을 가는 용기요.”

용기… 나에게 그런 용기가 있을까?

“무서워요. 실패하면 어떻게 하나 싶어서.”

“실패가 뭔가요? 현재보다 불행해지는 게 실패인가요? 그럼 지금 행복하신가요?”

지금 행복한가… 아니다. 전혀 행복하지 않다.

“아니요… 행복하지 않아요.”

“그럼 변화를 시도해볼 가치가 있는 거 아닌가요? 최소한 지금보다는 나아질 수 있잖아요.”

그의 말이 마음에 깊이 와 닿았다. 맞다. 지금도 불행한데 뭘 더 잃을 게 있을까?

“인수 씨는… 서점을 시작하실 때 무섭지 않으셨어요?”

“무서웠죠. 새로운 일이니까요. 하지만 더 무서운 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시간을 보내는 거였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것… 바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었다.

“후회하지 않으세요?”

“전혀요. 힘들 때도 있지만…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내가 원하는 삶… 나는 어떤 삶을 원할까?

“지연 씨도 분명 찾으실 거예요. 자신만의 길을.”

“정말 그럴까요?”

“네. 지금도 이렇게 고민하고 계시잖아요. 그 자체가 변화의 시작이에요.”

변화의 시작이라니. 그럼 내가 지금 겪고 있는 혼란과 고민들이… 의미 있는 과정인 건가?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어요. 하지만 포기하지 마세요.”

“감사해요. 이런 얘기 들어주셔서.”

“제가 더 감사하죠. 이런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깊은 대화… 정말 오랜만이었다. 누군가와 이렇게 진솔하게 이야기한 게 언제였을까?

“앞으로도… 가끔 와도 될까요? 이런 얘기 할 수 있는 곳이 필요해요.”

“언제든지 오세요. 저도 지연 씨와 대화하는 게 즐거워요.”

즐겁다니. 나와의 대화가 즐겁다니. 얼마나 오랫동안 그런 말을 듣지 못했을까?

집으로 가는 길이 가벼웠다. 마음이 한결 편해진 느낌이었다. 인수 씨와의 대화를 통해 내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

나는 변화가 필요하다. 새로운 나를 찾아야 한다.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주변의 반대도 있을 것이고, 실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보다는 나을 것 같다. 최소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은 들 것이다.

그날 밤, 오랜만에 일기를 썼다.

‘오늘 인수 씨를 만났다. 역시 그와 이야기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그는 내 마음을 이해해주는 유일한 사람인 것 같다.

나는 변화를 원한다. 새로운 나를 찾고 싶다. 하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 작은 것부터 해보자.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아보자. 천천히, 조급하지 말고.’

일기를 쓰고 나니 마음이 더 명확해졌다. 이제 시작이다.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여행의 시작.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다.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다. 그것만으로도 힘이 된다.

내일부터는 조금씩 달라져보자.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를 다짐한 지 며칠이 지났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뭘 해야 할지는 여전히 막막했다. 그래도… 예전과는 다른 마음가짐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봤다. 오랜만에 나 자신을 제대로 들여다봤다. 사십칠 세의 이지연. 주름이 생기기 시작했고, 머리카락도 조금씩 성기어지고 있지만… 아직은 괜찮다. 아니, 괜찮다고 해야 하나? 나쁘지 않다?

오늘은 평소보다 신경 써서 옷을 입었다. 화장도 조금 더 했다. 어디 특별한 곳에 갈 것도 아닌데… 그냥 기분을 위해서.

“오늘 어디 가?”

민호씨가 물었다.

“응? 아니, 그냥… 집안일 하고.”

“그런데 왜 이렇게 차려입었어?”

차려입었다고 할 정도는 아닌데. 그냥 평소보다 조금 더 신경 썼을 뿐인데.

“그냥… 기분 전환으로.”

민호씨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더 묻지 않았다.

민호씨가 출근하고 나서 나는 컴퓨터를 켰다. 오랜만이었다. 아이들 대학 입시 준비할 때 이후로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인터넷을 검색해봤다. ‘중년 여성 취미’, ’40대 새로운 시작’, ‘경력단절 여성 재취업’… 여러 가지 키워드로 찾아봤다.

생각보다 많은 정보가 있었다. 나 같은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겠지. 그림, 음악, 요리, 원예… 다양한 취미 활동들. 그리고 자격증 취득, 창업, 재취업…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사람들의 이야기들.

특히 눈에 들어온 건 ‘북카페 창업’에 관한 글이었다. 책과 커피를 함께… 뭔가 인수 씨의 서점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창업이라니… 너무 큰 일인 것 같다. 경험도 없고, 자본도 필요하고. 현실적이지 않다.

그럼 뭘 할까?

아, 그래. 일단 취미부터 찾아보자. 수진이 말처럼 그림을 배워볼까? 아니면 음악? 피아노를 어렸을 때 조금 쳤는데…

문화센터 홈페이지를 찾아봤다. 정말 다양한 강의들이 있었다. 그림, 음악, 요리, 어학… 심지어 창작활동 관련 강의도 있었다.

‘나의 이야기 쓰기’, ‘시 창작 입문’, ‘에세이 쓰기’…

글쓰기라니.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분야였다. 하지만 왠지 끌렸다. 최근에 책을 다시 읽기 시작하면서 느낀 건데… 누군가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게 이렇게 위로가 될 줄 몰랐다.

그럼 나도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에세이 쓰기’ 강의를 자세히 봤다. 매주 화요일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12주 과정. 수강료도 그리 비싸지 않았다.

신청해볼까? 하지만… 민호씨가 뭐라고 할까? 돈 쓰는 거라고 뭐라고 하지 않을까?

그때 인수 씨의 말이 떠올랐다. “용기를 내야죠. 다른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길을 가는 용기요.”

용기… 이 정도는 용기를 낼 만하지 않을까?

마우스를 클릭했다. 신청 버튼을 눌렀다. 떨리는 마음으로 개인정보를 입력하고, 수강료를 결제했다.

결제가 완료되는 순간… 뭔가 특별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나를 위해 뭔가를 한 것 같은. 오랜만에 내 의지로 선택한 것 같은.

전화가 왔다. 미경이었다.

“지연아, 뭐 해?”

“응, 그냥 집에 있어.”

“오늘 시간 있으면 만날까? 커피나 한 잔…”

“좋아.”

미경이와 만나서 문화센터 신청한 얘기를 해봐야겠다. 어떤 반응을 보일까?

카페에서 미경이를 만났다.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은데 표정이 밝아 보였다.

“지연아, 오늘 뭔가 다르다?”

“뭐가?”

“얼굴이 환해 보여. 좋은 일 있었어?”

환해 보인다니. 정말 그럴까?

“아… 문화센터 강의를 신청했어.”

“진짜? 뭘?”

“에세이 쓰기.”

미경이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에세이? 갑자기 왜?”

“그냥… 뭔가 새로운 걸 해보고 싶어서.”

“지연아, 정말 많이 변했다. 예전에는 이런 거에 관심 없었는데.”

변했다니… 정말 그런가? 나 자신도 느끼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 눈에도 그렇게 보이는구나.

“변한 게 나쁜 건 아니지?”

“아니, 나쁘지 않아. 오히려 좋은 것 같아. 그런데… 민호씨는 뭐라고 해?”

“아직 말 안 했어.”

“에? 왜?”

“뭐라고 할지 뻔해서.”

미경이가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말은 해야 하지 않을까? 숨길 일도 아니고.”

“그렇긴 한데… 왜 돈 쓰냐고 할 것 같아서.”

“아, 그럴 수도 있겠네. 하지만 지연이 인생이잖아.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미경이의 말에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래, 이 정도는 괜찮다. 나를 위한 최소한의 투자 아닌가?

“그런데 지연아…”

미경이의 목소리가 조금 진지해졌다.

“혹시 그 서점 사장님… 아직도 만나?”

가슴이 덜컥했다. 왜 갑자기 그 얘기를?

“가끔… 책 빌리러 가.”

“지연아, 조심해. 정말로.”

“왜? 뭐가 문제야?”

“네가 지금 감정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잖아. 이런 때 누군가에게 의존하게 되면…”

“의존하는 게 아니야. 그냥… 대화가 통하는 사람일 뿐이야.”

“그게 더 위험해. 마음이 통한다고 생각하게 되면…”

미경이의 걱정은 이해한다. 하지만… 내 마음을 이해해주는 유일한 사람을 포기하라고? 그건 너무 가혹하다.

“미경아, 나도 분별력은 있어. 선을 넘지 않을 거야.”

“지금은 그렇게 생각해도… 감정이라는 게 통제가 안 되잖아.”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거야? 평생 이렇게 혼자 살라고?”

“혼자가 아니잖아. 민호씨가 있고, 우리 같은 친구들도 있고.”

민호씨라니… 민호씨와 나 사이에 진정한 소통이 있을까? 친구들이라고 해도… 결국 이런 식으로 걱정만 하고 말리기만 하는데.

“내 마음을 정말로 이해해주는 사람은… 그 사람뿐인 것 같아.”

“지연아, 그건 착각이야. 네가 그렇게 느끼고 싶어하는 거지.”

착각이라니. 정말 착각일까? 인수 씨와 나누는 대화들, 그의 따뜻한 시선, 나를 이해하려고 하는 모습들… 그게 다 착각이란 말인가?

“설사 착각이라고 해도… 그 순간만큼은 진짜잖아. 내가 느끼는 감정은 진짜고.”

“그래서 더 위험한 거야. 진짜 감정이니까.”

우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지연아, 난 네가 걱정되는 거야. 정말로.”

“고마워. 하지만… 내 인생이잖아. 내가 선택해야 하는 거고.”

“그렇긴 하지만… 그 선택이 너를 더 힘들게 만들 수도 있어.”

더 힘들게? 지금보다 더 힘들 수 있을까? 지금도 충분히 힘든데.

카페를 나와서 집으로 가는 길에 서점 앞을 지났다. 불이 켜져 있었다. 인수 씨가 있다는 뜻이었다.

문화센터 강의 신청한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가 기뻐해줄 것 같았다. 나의 변화를, 나의 도전을.

하지만… 들어가지 않았다. 미경이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위험하다’, ‘조심하라’, ‘착각이다’…

정말 위험한 걸까? 나는 지금 위험한 길을 걷고 있는 걸까?

집에 도착해서 거울을 봤다. 아침에 봤을 때와는 다른 표정이었다.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표정.

민호씨가 들어왔다.

“오늘 뭐 했어?”

“미경이랑 커피 마셨어.”

“그래? 뭔 얘기했는데?”

문화센터 얘기를 해야 할까? 아니면 나중에? 언제까지 미룰 수는 없다.

“여보… 문화센터 강의를 신청했어.”

민호씨가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강의? 뭔데?”

“에세이 쓰기.”

“에세이? 갑자기 왜?”

“뭔가 새로운 걸 해보고 싶어서.”

민호씨의 표정이 굳어졌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돈은 얼마나 들어?”

역시나 돈 얘기부터 했다.

“12만원.”

“12만원? 그냥 취미로 하는 건데 그렇게 비싸?”

“12주 과정이니까… 한 주에 만원 꼴이야.”

“그래도 비싸네. 굳이 돈 내고 배워야 해? 책 사서 혼자 공부하면 안 돼?”

혼자 공부하는 것과 같이 배우는 건 다르다.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고, 피드백을 받고… 그런 과정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배우고 싶어.”

“음… 그래도 좀 아깝다. 다른 데 쓸 곳도 많은데.”

다른 데 쓸 곳… 나를 위한 건 아까운 거고, 다른 건 아깝지 않은 건가?

“나를 위한 거잖아.”

“나를 위한 거라니… 가족을 위해 쓰는 게 더 의미 있지 않을까?”

또 그 말이다. 가족을 위해서는 아무리 써도 되지만, 나를 위해서는 아까운 돈?

“이미 신청했어.”

“뭐? 미리 얘기도 안 하고?”

“얘기하면 반대할 것 같아서.”

“당연히 반대하지. 필요 없는 데 돈 쓰는 거잖아.”

필요 없다니. 내게는 꼭 필요한 일인데.

“나한테는 필요해.”

“뭐가 필요해? 글 쓰는 게 뭔 도움이 돼?”

도움… 모든 걸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로만 판단하는구나.

“도움이 안 돼도 하고 싶은 거야.”

“하고 싶다고 다 하면 어떻게 해? 돈도 한정되어 있는데.”

한정된 돈… 하지만 민호씨는 자신의 취미에는 돈을 쓴다. 골프 치러 가고, 회식비도 아끼지 않고.

“당신도 골프 치잖아.”

“그건 일 때문이야. 사업상 필요해서.”

사업상 필요해서라니. 정말 그럴까? 아니면 핑계일까?

“내게도 필요해. 나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라니… 그런 이기적인 생각을 언제부터 했어?”

이기적이라니. 나를 위한 최소한의 일이 이기적인 건가?

“이기적인 게 아니야. 당연한 권리야.”

“권리? 무슨 권리?”

“행복할 권리. 내가 원하는 걸 할 권리.”

민호씨가 한숨을 쉬었다.

“요즘 이상해. 예전에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예전에는… 예전의 나는 누구였을까? 아무 말 없이 순종하는 사람? 자신의 의견이 없는 사람?

“사람은 변해.”

“변하는 게 좋은 방향이어야지.”

좋은 방향… 내가 변하는 게 나쁜 방향인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으니까.

그날 밤, 잠이 오지 않아서 일기를 썼다.

‘오늘 에세이 쓰기 강의를 신청했다. 나를 위한 첫 번째 선택이었다. 떨렸지만… 뿌듯했다.

하지만 미경이는 걱정하고, 민호씨는 반대한다. 모두들 나를 위한다고 하지만… 정작 내 마음은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는다.

인수 씨에게만은 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 하지만… 위험하다고 하니까 망설여진다.

정말 위험한 걸까? 아니면 다들 변화를 두려워하는 걸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나는 변하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가… 나쁘지 않다는 것.’

일기를 쓰고 나니 마음이 조금 정리되었다.

내일부터는 다른 사람의 시선보다 내 마음에 솔직해지자. 위험하다고, 조심하라고 해도… 내가 느끼는 감정만큼은 진짜니까.

그리고… 인수 씨에게 가서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싶다. 내가 용기를 냈다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고.

그가 기뻐해줄 것 같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에세이 쓰기 강의가 시작된 지 한 달이 지났다. 매주 화요일 오전이 이렇게 기다려질 줄 몰랐다. 강의실에서 만나는 사람들, 각자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쓴 글을 다른 사람들이 읽어주는 순간들.

“지연 씨의 글은 정말 솔직하고 진솔해요.”

선생님이 내 글을 읽고 해주신 말씀이었다. 솔직하고 진솔하다니. 그 말이 이렇게 기쁠 줄 몰랐다.

이번 주 과제는 ‘나에게 가장 소중한 순간’에 대해 쓰는 것이었다. 나는 주저 없이 서점에서 인수 씨와 처음 만났던 날에 대해 썼다. 물론 이름은 바꿔서, 상황도 조금 각색해서.

하지만 그 순간의 설렘, 마음이 통한다는 느낌, 오랜만에 나 자신으로 대접받는다는 감동… 그런 감정들은 그대로 담았다.

“이 글을 읽으니까 저도 그런 만남이 그리워지네요.”

같은 수강생인 은경 씨가 말했다. 나와 비슷한 나이의 여성이었다. 아이들을 다 키우고 나서 자신만의 시간을 찾고 있다고 했다.

“정말 그런 사람이 있으세요?”

다른 수강생이 물었다. 순간 당황했다. 너무 생생하게 썼나?

“음… 비슷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거예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했으니까.

강의가 끝나고 은경 씨와 함께 커피를 마셨다. 이런 친구가 생긴 것도 이 강의의 큰 수확이었다.

“지연 씨, 요즘 많이 밝아지신 것 같아요.”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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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봤을 때보다 확실히 다르세요. 뭔가… 생기가 있어 보여요.”

생기가 있다니. 정말 그럴까? 거울을 볼 때마다 느끼긴 했지만, 다른 사람도 알아볼 정도인가?

“새로운 걸 배우니까 재미있어요.”

“남편분은 뭐라고 하세요? 지지해주시나요?”

남편 얘기가 나오자 표정이 어두워졌다. 민호씨는 여전히 못마땅해했다. 돈 쓰는 것도 그렇고, 내가 변하는 것도 그렇고.

“음… 그냥 그래요.”

“아, 그렇구나. 우리 남편들은 아직 우리가 변하는 걸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것 같아요.”

정말 그렇다. 왜 그럴까? 우리가 변하면 그들에게 위협이 되는 건가?

집으로 가는 길에 서점 앞을 지났다. 요즘은 일부러 이 길로 다닌다. 인수 씨가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하지만 들어가지는 않고 있었다. 미경이의 말이 자꾸 생각나서.

오늘도 불이 켜져 있었다. 그가 있다는 뜻이었다. 잠깐만… 들어가서 강의 얘기라도 해볼까? 그가 기뻐해줄 것 같은데.

결국 발걸음을 돌렸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아, 지연 씨!”

역시나 반가워하는 목소리였다. 가슴이 뛰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정말 오랜만이죠. 어떻게 지내셨어요?”

“좋은 일이 있어서 와봤어요.”

“좋은 일이요?”

“문화센터에서 에세이 쓰기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인수 씨의 얼굴이 환해졌다.

“정말요? 대단하세요! 용기를 내셨구나.”

용기를 냈다니. 그의 말이 이렇게 기쁠 줄 몰랐다.

“인수 씨 말씀을 듣고 용기를 낸 거예요.”

“어떠세요? 재미있으신가요?”

“네, 정말 재미있어요. 내가 이런 걸 좋아하는 줄 몰랐어요.”

“좋아하는 걸 찾으셨구나. 정말 기뻐요.”

그의 기쁨이 진심으로 느껴졌다. 내 일처럼 기뻐해주는 사람이 또 있을까?

“오늘 과제가 ‘나에게 가장 소중한 순간’에 대해 쓰는 거였어요.”

“어떤 순간에 대해 쓰셨어요?”

“음… 어떤 사람과의 첫 만남에 대해서요.”

말하고 나서 괜히 부끄러워졌다. 너무 직접적인 말은 아니었지만… 그가 알아챌까?

“좋은 만남이었나 보네요.”

“네… 제 인생을 바꿔준 만남이었어요.”

인생을 바꿔준 만남… 그렇다. 인수 씨와의 만남이 내 인생을 바꿔놓았다. 이렇게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된 것도,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도 모두 그와의 만남 때문이었다.

“그런 만남이 있다는 건 행운이죠.”

“네…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우리는 잠시 조용해졌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지연 씨…”

“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뭘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저도… 지연 씨와의 만남이 소중해요.”

소중하다니.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저도요.”

“처음에는 그냥… 좋은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손님이 들어온 것 같았다.

“어서 오세요.”

인수 씨가 인사를 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누가 들어왔는지 봤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미경이었다.

“지연아? 너 여기서 뭐 해?”

미경이의 목소리에 당황함이 섞여 있었다. 나를 찾아다녔던 건가?

“아… 미경아. 책 좀 보러 왔어.”

“책을?”

미경이의 시선이 나와 인수 씨 사이를 오갔다. 뭔가 수상하다는 표정이었다.

“안녕하세요.”

인수 씨가 미경이에게 인사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미경이도 어색하게 인사를 받았다.

“미경아, 갑자기 웬일이야?”

“집에 갔는데 없어서… 혹시나 해서 이 근처를 찾아봤어.”

거짓말 같았다. 집에서 나를 찾을 이유가 있었나? 아니면… 나를 감시하려고 온 건가?

“무슨 일이라도 있어?”

“아니… 그냥 심심해서 만나자고 하려고.”

심심해서… 정말 그럴까?

“그럼… 나갈까?”

“응.”

인수 씨를 보니 아쉬운 표정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던 얘기를 끝까지 못 했으니까.

“다음에 또 올게요.”

“네… 언제든지 환영이에요.”

서점을 나와서 미경이와 함께 걸었다. 분위기가 어색했다.

“지연아…”

“응?”

“혹시… 그 사람이?”

“뭐가?”

“전에 말했던… 서점 사장님?”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부인하면 거짓말이고, 인정하면… 또 잔소리를 들을 텐데.

“응.”

“지연아, 정말 위험해 보여.”

“뭐가 위험해?”

“분위기가… 뭔가 이상해. 둘 다 얼굴이 빨갛고…”

얼굴이 빨갛다고? 정말 그랬나?

“그냥 반가워서 그래.”

“지연아, 솔직히 말해. 그 사람한테 마음이 있지?”

마음이… 있다고 해야 하나? 없다고 해야 하나?

“잘 모르겠어.”

“잘 모르겠다는 건 있다는 거야.”

미경이의 목소리가 심각해졌다.

“지연아, 이건 정말 안 돼. 너 결혼한 여자야.”

또 그 말이다. 결혼한 여자라서 감정을 가지면 안 된다는 말.

“감정을 어떻게 통제해?”

“통제해야지. 가정이 있잖아.”

가정… 정말 내게 가정이 있나? 민호씨와 나 사이에 진정한 가정이 있나?

“미경아, 너는 행복해?”

“갑자기 왜 그래?”

“그냥… 궁금해서. 너는 결혼생활이 행복해?”

미경이가 잠시 말이 없었다.

“완전히 행복하지는 않아. 하지만… 그게 현실이야. 우리 나이에 완벽한 행복을 바라는 게 욕심이지.”

완벽한 행복이 욕심이라니. 정말 그럴까? 조금의 행복도 바라면 안 되는 건가?

“그럼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야?”

“지연아, 현실을 봐. 네가 지금 그 사람과 어떻게 된다고 해도… 결국 상처받는 건 너야.”

상처받는다… 정말 그럴까? 하지만 지금도 상처받고 있는데. 매일 무의미한 하루를 보내면서,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지금도 상처받고 있어.”

“그래도 안전하잖아. 최소한 가정은 지킬 수 있고.”

안전하다… 그 안전함이 나를 죽이고 있는데.

“미경아, 나 좀 혼자 있고 싶어.”

“지연아…”

“나쁘게 생각하지 마. 그냥…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미경이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지만.

집에 혼자 돌아와서 거울을 봤다. 정말 얼굴이 빨갛다. 미경이 말이 맞았다.

인수 씨도 나와 같은 마음일까? 방금 전에 뭘 말하려고 했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다음 말은 뭐였을까?

하지만… 알아서 뭐하지? 미경이 말이 맞다. 나는 결혼한 여자고, 그는… 그도 분명 이런 상황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날 밤, 민호씨가 평소보다 일찍 들어왔다.

“오늘 미경이가 전화했어.”

가슴이 덜컥했다. 미경이가 민호씨에게 뭐라고 했을까?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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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요즘 좀 이상하다고. 혼자 나다니기도 하고…”

역시 그랬구나. 미경이가 민호씨에게 일렀다.

“혼자 나다닌다고? 문화센터 다니는 거 말하는 거야?”

“그것만이 아니라… 다른 곳도 간다고 하던데?”

다른 곳… 서점 얘기인가?

“어디 가는지도 말 못해?”

“어디 가든 상관없어. 하지만… 미경이가 걱정하더라.”

걱정… 무슨 걱정?

“무슨 걱정?”

“혹시… 다른 남자라도 있는 거 아니냐고.”

결국 말했구나. 미경이가 민호씨에게 다 말했다.

“그런 거 아니야.”

“정말?”

민호씨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의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정말이야. 그냥… 책 보러 가는 거야.”

“어느 서점?”

구체적으로 묻는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동네 작은 서점…”

“남자가 하는 서점?”

결국 미경이가 다 말했구나.

“응.”

“거기 자주 가?”

“가끔…”

“왜?”

왜냐고…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그가 좋아서? 그와 대화하고 싶어서? 그 말을 할 수는 없다.

“책이 좋아서.”

“책은 다른 데서도 볼 수 있잖아.”

“거기가… 편해서.”

“편하다고?”

민호씨의 목소리에 의심이 가득했다.

“지연아, 솔직히 말해. 혹시 그 남자한테…”

“아니야.”

빨리 부인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떨렸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목소리부터 떨리잖아.”

“정말 아무것도 없어.”

“그럼 다시는 그 서점에 가지 마.”

가지 말라고? 그럴 수는 없다.

“왜?”

“의심받을 만한 행동은 하지 마.”

의심받을 만한 행동… 내가 뭘 잘못했다는 건가?

“난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어.”

“잘못하기 전에 미리 차단하는 거야.”

차단이라니. 마치 내가 범죄라도 저지를 것처럼.

“그럴 권리가 있어?”

“권리? 남편한테 권리가 없으면 누구한테 있어?”

남편의 권리… 그럼 내 권리는? 내가 원하는 사람을 만날 권리는?

“나도 내 권리가 있어.”

“무슨 권리?”

“자유롭게 행동할 권리.”

“자유? 결혼한 여자가 무슨 자유야?”

결혼한 여자는 자유가 없다는 말인가? 결혼과 함께 모든 자유를 포기해야 하는 건가?

“난 노예가 아니야.”

“노예라니… 무슨 소리야?”

“당신 말대로 하면 노예나 다름없어.”

민호씨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연아, 정신 차려. 가정이 있는 여자가 다른 남자랑…”

“아무것도 안 했다니까!”

“지금은 안 했어도 나중에는 모르지.”

나중에는 모른다니. 나를 그렇게 믿지 못하는 건가?

“나를 그렇게 보는 거야?”

“요즘 네가 너무 변했어. 예전 같지 않아.”

변했다… 맞다. 나는 변했다. 하지만 그게 잘못된 건가?

“변하는 게 잘못된 거야?”

“가정을 위협하는 방향으로 변하면 잘못된 거지.”

가정을 위협한다니. 내가 뭘 위협한다는 건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으니까.

그날 밤, 잠이 오지 않았다. 민호씨의 말들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정말 내가 잘못된 걸까? 결혼한 여자가 다른 남자를 좋아하는 게 그렇게 큰 죄일까?

하지만… 내 마음을 속일 수는 없다. 나는 인수 씨를 좋아한다. 그와 함께 있을 때 행복하다. 그와 대화할 때 살아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 감정을 포기해야 하는 건가? 다시 예전의 무의미한 삶으로 돌아가야 하는 건가?

하지만… 가정은? 민호씨는? 아이들은?

너무 복잡했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이제 더 이상 예전 같은 삶을 살 수는 없다는 것. 뭔가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

그런데… 어떤 결정을?

며칠째 서점 앞을 지나가면서도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민호씨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다시는 그 서점에 가지 마.” 하지만… 가고 싶다. 인수 씨가 보고 싶다.

에세이 강의마저 빠지고 싶었다. 은경 씨가 전화를 걸어서 겨우 정신을 차렸다.

“지연 씨, 지난주부터 안 보이시는데 괜찮으세요?”

“아… 몸이 좀 안 좋아서요.”

거짓말이었다. 몸이 아픈 게 아니라 마음이 아팠다.

“오늘은 꼭 나오세요. 선생님이 지연 씨 글을 기다리고 계세요.”

결국 강의에 나갔다. 하지만 집중이 안 됐다. 다른 사람들의 글을 들으면서도 자꾸 딴생각이 났다.

“지연 씨, 이번 주 과제는 안 써오셨나요?”

선생님이 물으셨다. 과제… 까먹었다. 아니, 정확히는 쓸 마음이 나지 않았다.

“죄송해요. 다음 주에 꼭 가져올게요.”

강의가 끝나고 은경 씨가 다가왔다.

“지연 씨, 요즘 많이 힘들어 보여요.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에요… 그냥 좀 복잡해서요.”

“혹시 가정 문제?”

은경 씨는 눈치가 빨랐다. 아니면 비슷한 경험이 있는 건가?

“음… 그런 것 같아요.”

“이야기하고 싶으시면 언제든 연락하세요. 저도 비슷한 일을 겪어봐서…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비슷한 일이라니. 은경 씨도 이런 고민을 했다는 건가?

집으로 가는 길에 또 서점 앞을 지났다. 불이 켜져 있었다. 창문 너머로 인수 씨의 모습이 보였다. 책을 읽고 있는 것 같았다.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인수 씨가 고개를 들어 창밖을 봤다. 우리 눈이 마주쳤다. 그가 손을 들어 인사했다. 나도 어색하게 손을 들었다.

그가 문 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문을 열 것 같았다. 나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집에 도착해서 거울을 봤다. 초라한 모습이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초라해졌을까?

그날 저녁, 민호씨가 일찍 들어왔다.

“오늘 문화센터 갔다 왔어?”

“응.”

“어땠어?”

“그냥… 그랬어.”

“요즘 별로 재미없어 보이는데? 그만둘까?”

그만두라는 뜻인가? 내가 유일하게 즐거워하는 일마저 그만두라고?

“아니야. 재미있어.”

“그래? 그런데 표정이 안 좋은데?”

표정이 안 좋을 수밖에. 내 마음을 이해해주는 사람도 만날 수 없고, 하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고.

“그냥… 피곤해서.”

“그래. 너무 무리하지 마.”

무리한다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데.

밤에 잠이 오지 않아서 일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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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너무 힘들다. 인수 씨를 만날 수도 없고, 그에 대한 내 마음도 정리가 안 된다.

민호씨는 내가 변하는 걸 원하지 않는다. 예전처럼 순종적인 아내로 살기를 원한다. 하지만 나는 이미 변했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이대로 계속 갈등하며 살아야 하는 건가?

아니면… 정말로 큰 결단을 내려야 하는 건가?’

일기를 쓰다가 문득 생각했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뭘까? 인수 씨와 함께 있는 것? 아니면 그냥 나 자신으로 살 수 있는 자유?

다음 날, 은경 씨가 전화를 걸어왔다.

“지연 씨, 시간 있으시면 만날까요? 어제 많이 힘들어 보이셔서…”

“네… 좋아요.”

카페에서 은경 씨를 만났다. 그녀는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밝아 보였다.

“지연 씨, 혹시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셨나요?”

너무 직접적인 질문에 당황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저도 그런 적이 있어서.”

역시 은경 씨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구나.

“어떻게… 하셨어요?”

“처음에는 정말 혼란스러웠어요. 죄책감도 들고, 가정에 대한 책임감도 있고…”

나와 똑같은 마음이었구나.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일단 제 마음을 정리했어요. 정말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일시적인 감정인지.”

“그래서… 어떤 결론을 내리셨어요?”

“저는… 그 사람을 정말 좋아한다는 걸 알았어요. 하지만 동시에 제가 원하는 건 그 사람과의 사랑이 아니라, 저 자신의 자유라는 것도 깨달았어요.”

자신의 자유… 그것이 핵심인가?

“지금은 어떻게 지내세요?”

“남편과 이혼했어요.”

이혼이라니. 깜짝 놀랐다.

“이혼을… 하셨어요?”

“네. 쉽지 않았지만… 그게 저에게는 최선이었어요.”

“그 남자분과 결혼하신 건가요?”

“아니에요. 그분도 결혼하신 분이라서… 서로 자신의 길을 가기로 했어요.”

그럼 사랑 때문에 이혼한 게 아니라…

“그럼 왜 이혼을…”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요. 더 이상 남편의 허락을 받으며 살고 싶지 않았어요.”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 그런 이유로도 이혼할 수 있구나.

“후회하지 않으세요?”

“전혀요. 물론 경제적으로는 힘들어졌지만… 마음은 훨씬 편해요.”

“아이들은…”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이제는 이해해줘요. 엄마가 행복한 게 가장 중요하다고.”

아이들이 이해해준다니. 우리 수진이와 현우는 어떨까?

“지연 씨도 심각하게 고민 중이시군요.”

“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일단 본인의 마음부터 정리하세요. 정말 그 사람을 원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현재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건지.”

정말 인수 씨를 원하는 건가? 아니면 그냥 지금 상황이 싫은 건가?

집으로 돌아와서 혼자 생각해봤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뭘까?

인수 씨와 함께 있는 것? 물론 그와 함께 있으면 행복하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일까?

아니다.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나 자신으로 살 수 있는 자유다. 누군가의 허락을 받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자유.

인수 씨는… 그 자유를 깨닫게 해준 사람이다. 사랑의 대상이기 이전에, 나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사람.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그날 밤, 결심을 했다. 인수 씨를 만나러 가겠다. 민호씨가 뭐라고 해도, 미경이가 뭐라고 해도. 내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서라도 그를 만나야 한다.

다음 날 오후, 서점으로 갔다. 며칠 만에 문을 여는 순간… 마음이 떨렸다.

“어서 오세요… 지연 씨!”

인수 씨의 목소리에 기쁨과 안도가 섞여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정말 오랜만이죠. 걱정했어요.”

걱정했다니. 나를 걱정해줄 사람이 있다는 게 이렇게 고마울 줄 몰랐다.

“죄송해요. 좀… 복잡한 일이 있어서.”

“괜찮으세요? 얼굴이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인수 씨… 말씀드릴 게 있어요.”

“네, 뭐든지 말씀하세요.”

“지난번에 하시려던 말씀… 끝까지 듣고 싶어요.”

인수 씨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지연 씨… 저는…”

“저도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뭔가요?”

“저… 인수 씨를 좋아해요.”

말하고 나니 가슴이 뛰었다. 드디어 말했다. 내 마음을.

인수 씨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조용히 말했다.

“저도… 지연 씨를 좋아합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왜 마음이 복잡할까?

“하지만…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인수 씨가 물었다. 나도 모르겠다. 서로 좋아한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되는 건 아니니까.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일단 마음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다행이에요.”

“지연 씨는…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솔직히 말하면… 인수 씨와 함께 있고 싶어요. 하지만…”

“하지만?”

“가정이 있잖아요. 그리고… 제가 정말 원하는 게 인수 씨와의 사랑인지, 아니면 그냥 자유인지… 확실하지 않아요.”

정말 솔직한 마음이었다. 인수 씨를 좋아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

“저도 비슷해요. 지연 씨를 정말 좋아하지만… 지연 씨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아요.”

그의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나의 행복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인수 씨… 저에게 시간을 주세요. 제 마음을 정리할 시간을.”

“네, 얼마든지요.”

“그리고… 혹시 제가 다른 선택을 한다고 해도… 이해해 주세요.”

“무슨 말씀이세요?”

“저… 이혼을 생각하고 있어요.”

인수 씨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혼을요? 저 때문에?”

“인수 씨 때문만은 아니에요. 저 자신을 위해서예요.”

“지연 씨…”

“더 이상 남편의 허락을 받으며 살고 싶지 않아요. 제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어요.”

인수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지연 씨가 원하는 거라면… 저는 지지해드려요.”

“고마워요. 하지만… 이혼한다고 해서 인수 씨와 바로 어떻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세요.”

“알고 있어요. 저도 제 삶을 정리해야 할 것들이 있어요.”

우리는 서로를 바라봤다. 사랑하지만… 당장 함께할 수는 없는 두 사람.

“그럼… 각자의 길을 가는 건가요?”

“지금은 그래야 할 것 같아요. 하지만… 언젠가는…”

“언젠가는?”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때는 더 자유로운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내 마음을 확인했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겠다.

이혼… 쉽지 않을 것이다. 민호씨도 반대할 것이고, 주변 사람들도 말릴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나는 자유롭게 살고 싶다. 나 자신으로서.

그날 밤, 일기에 썼다.

‘오늘 인수 씨와 마음을 확인했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한다. 하지만 당장 함께할 수는 없다.

나는 이혼을 결심했다. 인수 씨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다.

두렵다. 하지만…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다. 변화가 필요하다.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다.’

마침내 결심을 굳혔다. 이제 실행에 옮길 일만 남았다.

결심을 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민호씨에게 이혼 이야기를 꺼내야 하는데… 쉽지 않다.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까?

그사이 에세이 강의는 계속 나갔다. 오히려 더 열심히 참여했다. 이제 이것마저 빼앗길 수 없었다.

“지연 씨, 요즘 글이 확실히 달라졌어요.”

선생님이 내 에세이를 읽고 말씀하셨다.

“어떤 점이 달라졌나요?”

“더 솔직해졌어요. 그리고… 뭔가 결단력 있는 느낌이 들어요.”

결단력이라니. 정말 그럴까? 나 자신도 느끼고 있었다. 예전보다 확실해진 것 같다는 느낌을.

이번 주 과제는 ‘내가 꿈꾸는 미래’에 대해 쓰는 것이었다. 나는 주저 없이 펜을 들었다.

*’나는 더 이상 누군가의 그림자로 살고 싶지 않다.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가 아닌, 오롯이 나 자신으로 살고 싶다.

작은 카페를 운영하고 싶다. 책도 함께 파는 북카페 말이다. 사람들이 와서 차 한 잔 마시며 책을 읽고, 때로는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공간.

나이가 많다고? 늦었다고? 상관없다. 지금이라도 시작하면 된다. 두려움보다 기대가 더 크다.’*

글을 쓰면서 가슴이 뛰었다. 정말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돈도 필요하고, 경험도 부족하고… 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은경 씨도 새로운 삶을 시작했잖아.

“와, 지연 씨. 정말 구체적인 꿈이네요!”

은경 씨가 내 글을 듣고 감탄했다.

“실현 가능할까요?”

“왜 안 돼요? 요즘 북카페 정말 인기 있잖아요.”

“하지만 경험도 없고…”

“경험은 하면서 쌓는 거죠. 중요한 건 의지예요.”

의지… 나에게 그런 의지가 있을까?

강의가 끝나고 은경 씨와 커피를 마시면서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지연 씨, 이혼 결심은 어떻게 되셨어요?”

“아직… 말을 못 꺼냈어요.”

“언제 말씀하실 거예요?”

“이번 주 안에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것 같아요.”

“많이 무서우시죠?”

“네… 하지만 안 할 수는 없어요.”

은경 씨가 내 손을 잡았다.

“지연 씨는 할 수 있어요. 지금까지도 많이 변했잖아요.”

정말 그럴까? 나는 정말 할 수 있을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서점 앞을 지났다. 인수 씨와 마음을 확인한 이후로는 마음이 편해졌다. 서로를 좋아한다는 것, 하지만 각자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오늘은 용기를 내서 들어가 봤다.

“안녕하세요.”

“지연 씨, 어서 오세요. 오늘은 어떠세요?”

“조금 더 나아진 것 같아요.”

“다행이네요. 차 한 잔 하시겠어요?”

“네, 좋아요.”

작은 카페 공간에 앉아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인수 씨, 저 북카페 창업 생각해보고 있어요.”

“정말요? 멋진 꿈이네요.”

“가능할까요?”

“왜 안 돼요? 지연 씨라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의 격려가 힘이 되었다.

“여기 서점처럼… 사람들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좋은 생각이에요. 그런 공간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거든요.”

“인수 씨도 그런 마음으로 이 서점을 시작하신 거죠?”

“네, 맞아요. 혼자만의 공간이 아니라, 함께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나눌 수 있는 공간… 좋은 표현이다.

“언제쯤 실행에 옮기실 생각이세요?”

“아직… 정리해야 할 일들이 있어서요.”

인수 씨가 무슨 말인지 알아듣는 표정이었다.

“그 일이 정리되면… 연락드려도 될까요? 조언을 구하고 싶어서요.”

“언제든지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기꺼이 도와드릴게요.”

고마운 사람이다.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지금은 좋은 친구, 든든한 조언자로 남아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집에 도착하니 민호씨가 일찍 들어와 있었다.

“일찍 들어왔네?”

“응. 오늘 회의가 일찍 끝났어.”

“그래.”

평소 같으면 그냥 넘어갔을 텐데, 오늘은 달랐다. 이야기를 꺼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여보… 얘기할 게 있어.”

“뭔데?”

민호씨가 TV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중요한 얘기야.”

내 표정이 심각해서 그런지 민호씨도 TV를 껐다.

“뭔 얘기인데?”

“우리… 이혼하자.”

민호씨가 멍하니 나를 바라봤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뭐라고?”

“이혼하자고 했어.”

“갑자기 무슨 소리야?”

갑자기가 아니다. 오랫동안 생각했다. 하지만 민호씨에게는 갑작스러울 수밖에.

“갑작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저는 오래 생각했어요.”

“이유가 뭔데? 내가 뭘 잘못했어?”

잘못했다기보다는… 우리가 맞지 않는 것 같다.

“잘못한 게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삶이 달라요.”

“원하는 삶이 다르다고? 지금까지 잘 살아왔잖아.”

잘 살아왔을까? 정말로?

“겉으로는 잘 사는 것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저는 행복하지 않았어요.”

“행복하지 않았다고? 뭐가 부족해서?”

“자유가 없었어요. 제가 원하는 걸 할 수 없었어요.”

“자유? 뭔 자유?”

“제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자유요.”

민호씨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서점 남자 때문이지?”

역시 그 얘기부터 하는구나.

“그 분은 계기일 뿐이에요. 진짜 이유는 저 자신 때문이에요.”

“계기라니… 그럼 정말 그 남자랑 뭔가 있는 거야?”

“감정적으로는… 있어요.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감정적으로 있다는 게 뭐야? 좋아한다는 거야?”

“네.”

솔직하게 말했다. 더 이상 숨길 이유가 없었다.

민호씨가 벌떡 일어났다.

“이게 말이 돼? 결혼한 여자가 다른 남자를 좋아한다고?”

“저도 사람이에요. 감정을 가질 수 있어요.”

“가정이 있는 사람이 무슨 감정이야!”

“가정이 있다고 해서 제 감정까지 죽일 수는 없어요.”

“그럼 그 남자랑 결혼하려고 이혼하자는 거야?”

“아니에요. 그분과는 각자의 길을 가기로 했어요.”

“그럼 왜 이혼을 하려고 해?”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요.”

“자유롭게? 지금도 자유롭게 살고 있잖아.”

자유롭게?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전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그게 당연한 거 아니야? 부부니까.”

당연하다니. 정말 그게 당연한 건가?

“저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지연아, 정신 차려. 나이가 몇 살인데 이런 철없는 소리를 해?”

철없는 소리라니.

“철없는 게 아니에요. 진지한 결정이에요.”

“아이들은 어떻게 하려고? 아이들 생각은 해봤어?”

아이들… 물론 생각해봤다. 하지만 아이들도 이제 어른이다.

“아이들에게도 말할 거예요. 이해해달라고.”

“이해해달라고? 엄마가 바람펴서 이혼한다고?”

바람을 피웠다니. 그런 식으로 말하면…

“바람 피운 게 아니에요. 그냥… 제 인생을 살고 싶을 뿐이에요.”

“네 인생을 산다고? 지금까지 뭘 한 거야?”

지금까지… 남의 인생을 살았다. 남편의 아내로, 아이들의 엄마로.

“지금까지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았어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는 게 잘못된 거야?”

“잘못된 건 아니지만… 저도 저를 위해 살 권리가 있어요.”

민호씨가 한숨을 크게 쉬었다.

“지연아, 다시 생각해봐. 이혼하면 너만 힘들어져.”

“힘들어도 괜찮아요. 지금보다는 나을 것 같아요.”

“경제적으로도 힘들어지고…”

“일할 거예요.”

“일? 뭔 일?”

“북카페를 해보려고요.”

“북카페? 돈이 얼마나 드는지 알아?”

“알아봤어요. 작게 시작하면 가능해요.”

민호씨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정말 미쳤구나. 나이 오십에 북카페를 하겠다고?”

나이 오십… 그게 뭐 어때서?

“나이가 뭐가 중요해요? 하고 싶은 일이면 언제든 시작할 수 있어요.”

“꿈 같은 소리 하지 마. 현실을 봐.”

현실… 내가 보는 현실과 민호씨가 보는 현실이 다른 것 같다.

“제가 보는 현실은… 이대로 살다가는 제가 죽을 것 같다는 거예요.”

“죽는다고? 무슨 소리야?”

“마음이 죽는다는 얘기예요.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어요.”

민호씨와 나는 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봤다. 23년을 함께 산 부부지만…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생각할 시간을 줄게.”

민호씨가 말했다.

“이미 생각은 다 했어요. 결정도 내렸고요.”

“그래도… 일주일만 더 생각해봐.”

일주일… 내 마음이 바뀔까? 아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넘었다.

“일주일 후에도 제 마음은 같을 거예요.”

그날 밤, 수진이와 현우에게 각각 전화를 걸었다.

“엄마? 무슨 일이에요?”

“수진아… 엄마가 중요한 얘기가 있어.”

“뭔데요?”

“엄마가… 아빠와 이혼하려고 해.”

전화 너머로 수진이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네? 갑자기 왜요?”

“갑자기가 아니야. 오래 생각했어.”

“무슨 일이 있었어요?”

자세한 설명을 할 수는 없었다. 대신 핵심만 말했다.

“엄마가… 엄마 자신으로 살고 싶어져서.”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나중에 만나서 자세히 얘기할게. 지금은… 이해해달라는 말만 하고 싶어.”

현우와의 통화도 비슷했다. 둘 다 놀랐지만… 완전히 반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엄마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이들의 이해가 고마웠다. 이제 정말로 새로운 시작이 가능할 것 같다.

그날 밤 일기에 썼다.

드디어 말했다. 민호씨에게 이혼 이야기를. 아이들에게도 말했다.

무섭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이제야 내 인생이 시작되는 것 같다.

북카페의 꿈도 현실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해보고 싶다.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내 삶의 색깔을 찾은 것 같다. 회색빛이었던 나의 일상에 이제야 색깔이 들어오는 것 같다.

무지개색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내가 좋아하는 색깔로 칠할 수 있을 것 같다.’

거울을 보니 얼굴에 생기가 돌아와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밝은 표정이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삶의 색깔이었다.

6개월이 흘렀다. 이혼 절차는 생각보다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민호씨도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내 의지가 확고한 걸 보고 결국 동의했다. 재산 분할도 합리적으로 이루어졌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나를 응원해준다. 특히 수진이는 “엄마가 이렇게 생기 있는 모습 처음 본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지금 나는 작은 원룸에서 혼자 살고 있다. 23년 만에 처음으로 온전히 내만의 공간이다. 작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꾸밀 수 있어서 행복하다.

벽에는 에세이 쓰기 수료증이 걸려 있다. 12주 과정을 모두 마쳤을 때의 그 뿌듯함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내가 쓴 첫 번째 에세이가 실린 문학 잡지가 있다.

“중년 여성의 자유를 찾아서”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내 경험을 바탕으로 쓴 글이 정말 잡지에 실릴 줄은 몰랐다. 원고료는 많지 않았지만… 내가 쓴 글로 돈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지 않았다.

“지연 씨, 정말 달라지셨어요.”

문화센터에서 만난 은경 씨가 말했다. 우리는 이제 에세이 동호회를 만들어서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다.

“어떻게 달라졌나요?”

“뭔가… 확신에 차 있어요. 예전에는 항상 주저주저하시더니.”

확신이라니. 정말 그럴까? 나 자신도 느끼고 있었다. 예전보다 훨씬 당당해졌다는 것을.

“북카페 계획은 어떻게 되고 있어요?”

“다음 달에 오픈해요.”

드디어 북카페를 열게 됐다. 작은 공간이지만, 내가 직접 찾아서 계약했다. 인테리어도 내 취향대로 하고 있다.

“와, 대단해요! 정말 해내시는군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요.”

“시작이 반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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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렇다. 시작이 반이다. 그리고 나는 이미 시작했다.

북카페 준비를 하면서 인수 씨에게 자주 조언을 구했다. 그는 변함없이 따뜻하게 도움을 주었다. 서점 운영 노하우부터 손님 응대 방법까지…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지연 씨, 메뉴는 어떻게 정하셨어요?”

“커피, 차, 간단한 디저트… 그리고 특별히 ‘책과 함께하는 차’ 메뉴를 만들었어요.”

“책과 함께하는 차요?”

“네. 책의 분위기에 맞는 차를 추천해드리는 거예요. 예를 들어 시집을 읽으실 때는 캐모마일 차, 소설을 읽으실 때는 얼 그레이…”

인수 씨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좋은 아이디어네요. 분명 손님들이 좋아하실 거예요.”

그의 격려가 항상 힘이 된다. 우리는 이제 좋은 친구가 되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진 건 아니지만… 지금은 이렇게 서로를 지지해주는 관계가 더 소중하다.

북카페 이름은 ‘책과 차’로 정했다. 단순하지만 명확한 이름이다. 간판도 직접 디자인했다. 따뜻한 느낌의 갈색 바탕에 하얀 글씨로.

오픈을 일주일 앞두고, 수진이와 현우가 찾아왔다.

“엄마, 여기가 북카페예요?”

“응, 어때?”

“완전 예뻐요! 정말 엄마가 꾸민 거예요?”

수진이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럼. 엄마가 다 했어.”

“대박… 엄마한테 이런 재능이 있는 줄 몰랐어요.”

재능이라니. 나도 몰랐었다. 이런 일을 좋아한다는 것도, 이런 공간을 만들 수 있다는 것도.

“현우야, 너는 어때?”

“좋아요. 정말 편안한 느낌이에요. 여기서 책 읽으면 집중 잘 될 것 같아요.”

아이들이 좋아해주니까 더 뿌듯했다.

“엄마, 정말 괜찮을까요? 혼자서…”

수진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아. 걱정 마.”

“경제적으로도 괜찮으세요?”

“처음에는 힘들겠지만… 점점 나아질 거야.”

사실 걱정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두렵지는 않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니까.

“엄마가 행복해 보여서 다행이에요.”

현우가 말했다.

“정말요?”

“네. 예전에는… 뭔가 늘 피곤해 보이셨는데, 지금은 완전 달라요.”

아이들 눈에도 그렇게 보이는구나. 나 자신도 느끼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이 말해주니까 더 확신이 든다.

오픈 하루 전, 혼자 북카페에 앉아서 주변을 둘러봤다. 작지만 아늑한 공간. 책장에는 내가 직접 고른 책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소설, 에세이, 시집, 자기계발서… 다양한 장르의 책들.

각 테이블에는 작은 화분이 놓여 있다. 초록색 식물들이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벽에는 따뜻한 조명이 설치되어 있고, 한쪽에는 내가 좋아하는 명언들을 적어놓은 작은 보드가 걸려 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인수 씨가 처음 보여준 시의 구절이다. 이제 나는 안다. 흔들리면서도 피울 수 있다는 것을. 완벽하지 않아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온 걸까? 아직 오픈 전인데…

“안녕하세요.”

인수 씨였다. 손에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인수 씨! 어떻게…”

“개업 축하 선물이에요. 내일이 오픈이죠?”

“고마워요. 들어오세요.”

그가 북카페를 둘러보는 모습을 지켜봤다.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정말 멋져요. 지연 씨 취향이 잘 드러나 있네요.”

“그래요?”

“네. 따뜻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이에요. 분명 성공할 거예요.”

“처음이라 걱정이 많아요.”

“처음이니까 당연하죠. 하지만 지연 씨라면 잘 해낼 거예요.”

그의 격려가 마지막 용기를 주었다.

“인수 씨… 정말 고마워요. 인수 씨를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제가 없었을 거예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지연 씨 덕분에 저도 많은 걸 배웠어요.”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더 이상 설렘이나 아픔이 아닌, 깊은 감사의 마음이었다.

“가끔 들러도 될까요?”

“언제든 환영이에요. 단골 손님 1호예요.”

드디어 오픈 날이 왔다. 아침 9시에 문을 열었다. 첫 손님은… 은경 씨였다.

“지연 씨! 축하해요!”

“고마워요. 정말 와주셔서.”

“당연히 와야죠. 첫 손님이 되고 싶었어요.”

은경 씨가 주문한 건 ‘시와 함께하는 캐모마일 차’였다. 내가 특별히 준비한 메뉴였다.

“와, 정말 맛있어요. 그리고 이 분위기… 정말 책 읽기 좋네요.”

오전에 몇 명 더 손님이 왔다. 대부분 동네 주민들이었다.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거나, 친구와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모습들.

점심시간에는 직장인들이 와서 샐러드와 커피를 주문했다. 오후에는 학생들이 와서 공부를 하기도 했다.

생각보다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왔다. 나이도, 직업도, 목적도 모두 달랐지만… 모두 이 공간을 편안해했다.

“사장님, 여기 정말 좋네요. 자주 올게요.”

한 손님이 나가면서 말했다. 사장님이라니… 아직 어색하지만 기분 좋은 호칭이었다.

저녁 9시, 문을 닫을 시간이 되었다. 첫날 매출을 계산해보니… 예상보다 좋았다. 물론 대박은 아니지만, 시작하기에는 나쁘지 않은 수준이었다.

혼자 정리를 하면서 오늘 하루를 되돌아봤다. 설레고, 떨리고, 때로는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행복했다. 정말 행복했다.

내 가게에서, 내가 우린 커피를 마시며,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는 손님들을 바라보는 것. 이것이 내가 꿈꿔왔던 삶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거울을 봤다. 피곤하지만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눈가에 주름이 생기고, 머리에 흰털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예전보다 훨씬 생기 있어 보였다.

일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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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드디어 북카페를 열었다. 첫날치고는 성공적이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와서 책을 읽고, 차를 마시고,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

정말 뿌듯하다. 내가 만든 공간에서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까…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있을까?

6개월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그때의 나는 매일 똑같은 일상에 지쳐 있었는데, 지금은 매일이 새롭고 기대된다.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경영도 배워야 하고, 손님 응대도 익숙해져야 하고… 하지만 두렵지 않다. 내가 정말 원하는 일이니까.

인수 씨에게 정말 감사하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런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그리고 나를 지지해준 은경 씨, 아이들,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다.

내 삶의 색깔을 찾았다. 회색빛이었던 일상이 이제는 따뜻한 갈색으로, 생기 있는 초록색으로, 희망적인 노란색으로 물들고 있다.

앞으로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두렵기보다는 기대된다. 이제야 진짜 내 인생이 시작되는 것 같다.’

창밖을 보니 별이 보였다. 도시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별들이 오늘따라 특별히 밝게 빛나고 있었다.

새로운 시작. 늦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금이 바로 최적의 시기였다. 경험도 쌓였고, 용기도 생겼고, 무엇보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되었으니까.

내일도 북카페에 손님들이 올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올까?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차를 마실까? 상상만 해도 설렌다.

사십팔 세에 시작한 새로운 인생. 늦은 나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가장 빛나는 시간이 될 것 같다.

그렇게 나는 내가 찾은 삶의 색깔과 함께 새로운 하루를 꿈꾸며 잠이 들었다.

1년 후.

“엄마, 여기 정말 유명해졌네요!”

수진이가 북카페 ‘책과 차’에 들어서며 감탄했다. 오늘은 개업 1주년 기념일이다. 작은 파티를 준비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와줬다.

“정말 그렇게 됐네.”

나도 믿기지 않는다. 1년 전 떨리는 마음으로 문을 열었던 이 작은 공간이 이제는 동네에서 꽤 알려진 곳이 되었다. 지역 신문에도 소개되었고, SNS에서도 ‘힐링 카페’로 입소문을 타고 있다.

“지연 언니, 축하해요!”

은경이가 케이크를 들고 왔다. 우리는 이제 서로를 언니, 동생으로 부른다. 나이 차이는 별로 없지만, 은경이가 먼저 언니라고 불러서 그렇게 되었다.

“고마워, 은경아.”

“1년 만에 이렇게 자리 잡다니… 정말 대단해요.”

정말 꿈만 같다. 처음 몇 달은 힘들었다. 손님도 많지 않았고, 경영도 서툴렀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매일 조금씩 개선해나갔다.

책 선정도 더 신중하게 했고, 메뉴도 계속 업그레이드했다. 무엇보다 손님들과의 소통을 중요하게 여겼다. 어떤 책을 원하는지, 어떤 분위기를 좋아하는지… 하나하나 귀 기울여 들었다.

“사장님!”

단골손님인 김 할머니가 들어오셨다. 70대인데도 매주 한 번씩 오셔서 시집을 읽으신다.

“어서 오세요, 할머니.”

“오늘 특별한 날이라고 들었는데, 축하드려요.”

“감사해요. 할머니께서 자주 와주셔서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아이고, 뭘요. 여기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서 제가 더 고마워요.”

마음이 편해진다니. 이보다 더 좋은 찬사가 있을까?

오후에는 문화센터 에세이 동호회 회원들이 함께 왔다. 우리는 이제 매월 여기서 모임을 갖는다. 각자가 쓴 글을 낭독하고, 서로 의견을 나누는 시간이다.

“지연 씨 덕분에 우리도 좋은 모임 장소가 생겼어요.”

“저도 덕분에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이런 순간들이 정말 행복하다. 내가 만든 공간에서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

저녁에는 특별한 손님이 왔다. 인수 씨였다.

“축하드려요, 지연 씨.”

“고마워요. 와주셔서.”

“1년 전 개업날도 생각나네요. 그때 얼마나 떨어하셨는지…”

“정말 그랬죠. 지금 생각하면 괜한 걱정이었네요.”

인수 씨는 여전히 서점을 운영하고 있다. 우리는 종종 만나서 책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좋은 친구가 되었다.

“요즘 글쓰기는 어떠세요?”

“계속하고 있어요. 다음 달에 에세이집이 나와요.”

“정말요? 축하드려요!”

내가 쓴 글들을 모아서 에세이집을 낼 예정이다. 제목은 ‘내 삶의 색깔을 찾아서’로 정했다. 출판사에서 먼저 제안해왔을 때는 정말 믿기지 않았다.

“인수 씨 덕분이에요. 인수 씨가 용기를 주지 않았다면…”

“지연 씨 자신의 용기였어요. 저는 그냥 옆에서 지켜봤을 뿐이에요.”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더 이상 설렘이나 아픔이 아닌, 진정한 우정의 미소였다.

파티가 끝나고 혼자 정리를 하면서 지난 1년을 돌아봤다.

쉽지 않았다. 이혼 후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도 있었고, 사업이 잘 안 될 때도 있었다. 외로운 밤들도 많았다.

하지만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내 가게로 출근하는 기분, 손님들과 나누는 따뜻한 대화, 새로운 책을 들여놓을 때의 설렘… 이 모든 것들이 내게는 보물 같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되었다는 것. 누군가의 허락을 받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가장 큰 변화다.

벽에 걸린 거울을 봤다. 1년 전보다 주름은 더 생겼지만, 표정은 훨씬 밝아졌다. 눈빛에 생기가 돌고, 입가에는 항상 미소가 머물러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찾은 삶의 색깔이다. 화려한 무지개색은 아니어도, 따뜻하고 포근한 내만의 색깔.

문득 민호씨가 궁금해졌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아이들을 통해 들은 소식으로는 나름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났다는 얘기도 들었다. 다행이다. 그도 행복했으면 좋겠다.

우리가 헤어진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단지 서로 다른 삶을 원했을 뿐이다. 이제는 그것을 이해한다.

현우가 전화를 걸어왔다.

“엄마, 1주년 축하해요!”

“고마워, 현우야.”

“엄마 에세이집 나오면 제가 첫 번째로 살게요.”

“그래? 고마워.”

“엄마가 정말 자랑스러워요. 이런 멋진 일을 해내시다니.”

자랑스럽다니.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들을 줄 몰랐다.

“수진이는 뭐 한다고?”

“언니는 회사에서 야근이에요. 나중에 축하 전화 드릴 거래요.”

“그래, 알았어.”

“엄마, 정말 행복해 보여서 좋아요.”

행복하다… 정말 그렇다. 진심으로 행복하다.

전화를 끊고 마지막 정리를 마쳤다. 내일도 이 공간에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어떤 손님들이 올까? 어떤 이야기들이 펼쳐질까?

상상만 해도 설렌다.

집으로 가는 길에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1년 전 처음 북카페를 열었던 그날 밤에도 이렇게 별이 빛났었다.

그때는 막막하고 두려웠지만, 지금은 가슴이 벅차다. 내가 해냈다. 정말로 해냈다.

집에 도착해서 일기를 썼다.

‘북카페 개업 1주년이다. 1년 전 이런 날이 올 줄 누가 알았을까?

그때의 나는 정말 용감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새로운 시작을 선택했으니까.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신기하다.

하지만 그 선택이 맞았다는 것을 이제는 확신한다. 힘든 순간들도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이 의미 있었다.

내가 찾은 삶의 색깔. 그것은 화려하거나 눈부시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 것이다. 내가 선택한, 내가 만들어낸 색깔.

2년 전만 해도 나는 회색빛 인생을 살고 있었다. 매일이 똑같고, 의미도 없고, 그저 시간만 흘러가는 그런 삶.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매일이 새롭고, 매 순간이 소중하고, 미래가 기대된다.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늦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지금이 바로 당신의 시간입니다.”

나이는 숫자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용기다. 변화를 선택할 용기, 자신만의 길을 갈 용기.

그 용기만 있다면, 누구든 자신만의 색깔을 찾을 수 있다.

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용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에세이집도 쓰는 것이고, 이 공간도 운영하는 것이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내일도 북카페에 새로운 이야기들이 찾아올 것이다. 그 이야기들 속에서 나도 계속 성장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꿈꿔왔던 삶이다. 내가 찾은 삶의 색깔과 함께하는 날들.’

일기를 덮고 창밖을 봤다. 내일도 좋은 하루가 될 것 같다.

사십팔 세에 찾은 내 삶의 색깔. 그것은 결코 늦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이 바로 가장 완벽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나는 내가 그려낸 색깔 속에서 새로운 꿈을 꾸며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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