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색깔을 찾아준 그 남자 (4장. 오래된 관계와 새로운 감정의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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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을 다 읽는 데 사흘이 걸렸다. 밤마다 조금씩 읽으면서 계속 생각에 잠겼다. 이 책의 주인공이 나와 얼마나 닮았는지… 섬뜩할 정도였다.

책을 덮고 나니 인수 씨가 더 그리워졌다. 이런 마음을 털어놓고 싶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복잡한 감정들을… 누구에게 말할 수 있을까? 민호씨에게? 미경이에게?

아니다. 그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

“여보, 요즘 책을 많이 읽네?”

민호씨가 침대에서 내가 책 읽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 관심이라기보다는… 그냥 말을 건네는 정도의 톤이었다.

“응, 오랜만에 재미있는 책을 만났어.”

“어떤 책인데?”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소설이야.”

“아, 그 책? 페미니즘 책이라던데?”

페미니즘이라니. 그냥 한 여성의 이야기인데. 왜 사람들은 여성의 현실을 그리면 페미니즘이라고 할까?

“페미니즘이라기보다는… 그냥 우리 같은 여자들의 이야기야.”

“우리 같은 여자들?”

민호씨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뭔가 경계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 그런 평범한 여자들 말이야.”

“음… 그런 책들 읽으면 괜히 불만만 생기지 않나?”

불만이라니. 내가 불만을 가지면 안 되는 건가? 내 삶에 대해서, 내 상황에 대해서?

“불만이라기보다는… 생각해보게 되는 거지.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지금도 잘 살고 있잖아. 뭘 더 바라?”

지금도 잘 살고 있다니. 정말 그럴까? 민호씨의 눈에는 내가 만족스럽게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그런가? 잘 모르겠어.”

“뭐가 불만이야?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어 있고, 아이들도 잘 자랐고…”

경제적 안정, 잘 자란 아이들. 그게 전부일까? 내 행복은? 내 꿈은? 내가 원하는 삶은?

“그런 게 다가 아니잖아.”

“그럼 뭐가 더 필요해?”

민호씨의 목소리에 약간의 짜증이 섞여 있었다. 이런 대화 자체를 귀찮아하는 것 같았다.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뭔가 허전해.”

“허전하다고? 할 일도 많고, 바쁘게 사는데?”

할 일이 많다고 해서 허전하지 않은 건 아니다. 오히려 더 허전할 수도 있다. 의미 없는 일들로 시간을 채우고 있을 때는.

“그냥… 내가 뭘 위해 사는지 모르겠어.”

“가족을 위해서 사는 거지. 당연하잖아.”

가족을 위해서… 그게 답일까? 나를 위해서는 안 되는 건가?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는 안 살아도 되는 거야?”

“무슨 소리야? 가족이 행복하면 너도 행복한 거잖아.”

정말 그럴까? 가족이 행복하면 나도 자동으로 행복해지는 걸까? 그럼 지금 나는 왜 이렇게 허전할까?

“그런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으니까.

민호씨는 핸드폰을 보기 시작했다. 대화 끝이라는 뜻이었다. 언제부터 우리는 이렇게 대화가 단절되었을까?

다음 날, 미경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연아, 무슨 일이야? 목소리가 좀 이상한데?”

“미경아… 나 요즘 좀 이상해.”

“왜? 몸이 안 좋아?”

“몸이 아니라… 마음이.”

미경이는 잠시 조용했다가 말했다.

“만나자. 카페에서.”

오랜만에 미경이와 만났다. 동네 카페에서 마주 앉으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뭔 일이야? 얼굴이 좀 달라 보인다.”

“달라 보여?”

“응. 뭔가… 고민이 많아 보여. 그런데 또 뭔가 생기가 있어 보이기도 하고.”

미경이는 역시 나를 잘 안다. 오래된 친구라서 그런가.

“미경아, 너는 행복해?”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냥… 궁금해서. 결혼하고 아이 낳고, 이렇게 사는 게… 행복한 건가 싶어서.”

미경이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완전히 행복하다고 할 수는 없지. 그렇다고 불행하다고 할 수도 없고. 그냥… 평범하게 사는 거지.”

평범하게.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평범한 게 잘못된 건 아니지만… 나는 뭔가 더 특별한 걸 원하는 것 같다.

“요즘 이상한 생각을 많이 해.”

“어떤 생각?”

“내가 지금까지 뭘 위해 살았나…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런 거.”

“중년의 위기 아니야? 요즘 그런 사람들 많다던데.”

중년의 위기라니. 그런 식으로 단순하게 정리할 수 있는 걸까?

“그런가? 그냥 넘어가면 되는 거야?”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다들 그런 시기가 있어.”

미경이의 말이 위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답답했다. 이것도 그냥 지나갈 시기라고? 내 마음이 이렇게 복잡한데?

“혹시… 다른 사람을 좋아해본 적 있어? 결혼한 후에?”

미경이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야, 너 뭔 소리야? 설마 바람 피우는 거 아니지?”

바람이라니. 그런 게 아닌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바람은 아니고… 그냥 마음이 끌리는 사람이 있어.”

“지연아, 정신 차려. 넌 결혼한 여자야.”

“알아. 그래서 복잡한 거야.”

“누구야? 어떻게 만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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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경이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걱정하는 목소리였다.

“서점 사장님… 우연히 만났어.”

서점 사장님이라고 하니까 좀 더 안전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미경이의 표정은 여전히 심각했다.

“지연아, 위험한 생각 하지 마. 가정이 있잖아.”

“아무것도 안 했어. 그냥… 대화를 나누는 정도야.”

“대화라도 조심해야 해. 그렇게 시작되는 거야.”

그렇게 시작되는 것… 무엇이? 불륜? 바람? 나는 그런 걸 원하는 게 아닌데.

“그냥…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서 기분이 좋았을 뿐이야.”

“민호씨가 이해 안 해줘?”

민호씨가… 이해해주나? 언제 마지막으로 민호씨와 진지한 대화를 나눠봤을까?

“요즘은 대화 자체를 별로 안 해.”

“그래도 남편이잖아. 노력해봐.”

노력이라니. 나 혼자 노력한다고 되는 건가?

“미경아, 너는 남편이랑 속마음 이야기해?”

“속마음까지는… 그냥 일상적인 얘기 정도지.”

“그럼 너도 마찬가지잖아.”

“그런데 그게 뭐 어때? 결혼생활이 원래 그런 거야.”

정말 그런 걸까? 결혼생활이 원래 이렇게 건조한 걸까? 서로에게 무관심한 게 정상인 걸까?

“지연아, 내 말 잘 들어. 그 사람 다시 만나지 마.”

“왜?”

“위험해. 지금 네가 감정적으로 취약한 상태야. 그런 때 누군가 따뜻하게 대해주면 착각하기 쉬워.”

착각이라니. 정말 착각일까? 인수 씨가 나를 대하는 마음이? 내가 느끼는 감정이?

“착각이라고 해도… 그 감정 자체가 나쁜 건 아니잖아.”

“나쁘지 않다고? 지연아, 정신 차려. 넌 결혼한 여자라고.”

또 결혼한 여자라는 말. 결혼한 여자는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끌리면 안 되는 건가? 인간적인 감정도 가지면 안 되는 건가?

“결혼했다고 해서 다른 감정을 가지면 안 되는 거야?”

“당연하지. 그게 책임이야.”

책임… 무거운 단어였다. 나는 가족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 자신에 대한 책임은?

카페를 나와서 집으로 가는 길이 무거웠다. 미경이의 말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하지만… 마음이 무거웠다. 내 감정을 부정당한 것 같아서.

집에 도착해서 거울을 봤다. 며칠 전만 해도 환해 보였던 얼굴이 다시 어두워져 있었다.

민호씨가 일찍 들어왔다.

“오늘 미경이 만났다며?”

“응.”

“뭔 얘기했어?”

“그냥… 일상 얘기.”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요즘 너 좀 이상해.”

“뭐가?”

“모르겠어. 뭔가… 다른 사람 같아.”

다른 사람 같다니.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나도 내가 달라지고 있다는 걸 느끼니까.

“그래?”

“예전에는 이런 질문들 안 했는데. 행복하냐, 뭘 위해 사냐… 그런 거.”

“그런 걸 생각해보면 안 돼?”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하나 싶어서.”

갑자기가 아니다.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생각들이 이제야 터져나오는 거다.

“나이가 들면서 그런 생각이 드는 것 같아.”

“음… 그런가.”

민호씨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관심이 없는 건지, 아니면 알고 싶지 않은 건지.

그날 밤, 잠이 오지 않았다. 미경이의 말들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위험해’, ‘정신 차려’, ‘결혼한 여자야’…

그 말들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왜 이렇게 답답할까?

나는 뭔가 잘못된 걸 하고 있는 건가? 단순히 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그 사람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만으로도?

아니면… 정말 위험한 길에 들어선 건가?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나는 인수 씨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것. 그리고 이 감정을 쉽게 포기할 수 없다는 것.

결혼한 여자라는 이유로, 사회적 책임이라는 이유로 내 마음을 억누르고 살아야 하는 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이기적인 건가?

답은 없었다. 다만… 혼란만 가중될 뿐이었다.

다음 날 아침, 민호씨가 출근하고 나서 인수 씨의 서점이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가고 싶었다. 하지만 갈 수 없었다. 미경이의 말이, 민호씨의 시선이, 사회의 눈이… 모든 게 나를 붙잡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은 이미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마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게 사랑의 시작일까? 아니면 단순한 일탈에 대한 욕구일까?

나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이 감정이 나를 살아있게 만든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소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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